‘눈치보는’ 기술영향평가
[한겨레 2004-02-10 22:54]
정부 정책을 산하기관이 평가하다보니 눈치만…
과학기술의 발전이 사회에 끼칠 영향을 미리 파악해 부정적 효과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지난해 처음 우리나라에 도입돼 관심을 모았던 기술영향평가 제도가 시행 1년 만에 ‘독립성’ 논란에 휩싸였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키스텝)은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라 지난해 6월 ‘나노-생명공학-정보 융합기술’(NBIT)을 첫번째 평가대상으로 삼아 15명의 평가위원회(위원장 이장무 서울대 교수)를 꾸려 3개월 가량의 평가작업을 마쳤으나, 평가보고서가 나온 지 넉달째 최종보고서를 내지 않고 있다. 보고서는 애초 지난해 10월 평가보고 간담회 이후 12월께 공개될 예정이었다.
당시 평가보고서는 사회문화적 영향과 관련해 “나노기술이 정보기술의 빈부 격차처럼 ‘나노 격차’라는 새로운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하거나 환경오염 물질을 만들지도 모를 우려를 낳고 있어 이에 대해 우리 사회가 충분히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 이런 융합기술이 당장 실용화할 것처럼 과장될 경우 중복·과다 투자 등 비용의 낭비를 부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부 평가위원들 사이에선 이처럼 신기술의 부정적 효과를 지적한 평가보고의 내용을 의식해 정부가 평가기관인 키스텝에 공개를 연기하도록 영향을 끼쳤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사회문화분과 평가위원인 김동광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소장은 “보고서 연기가 신기술에 관한 부정적 평가 부분을 순화하려는 의도가 아닌지 우려된다”며 “향후 평가 수정 여부를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키스텝 실무담당 연구원은 “평가보고서 내용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해 시민단체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간담회나 설문조사 등을 벌인 뒤 최종보고서를 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주관부처인 과학기술부 관계자도 “한차례의 전문가 간담회만을 열어 여러 의견을 충분히 모았다고 보기 어려워 다양한 전문가와 시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공청회를 벌여 내용을 보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발단은 보고서 연기에서 비롯됐지만 더 큰 문제는 과기부가 주관하는 나노-생명공학-정보 융합기술을 과기부 산하기관인 키스텝이 평가작업을 이끌도록 한 평가 구조의 한계로 쏠리고 있다. 산하기관이 주관부처의 연구개발 정책에 대해 독립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기술영향평가 보고서의 발표 연기는 지난해 10월 평가보고의 내용을 과기부가 파악한 이후에 과기부와 키스텝의 협의에 의해 이뤄져 이런 우려를 더욱 자아내고 있다.
사회분화분과 위원장인 이영희 가톨릭대 교수(사회학)는 “신기술 정책을 평가받아야 할 과기부가 평가 내용에 관여할 수 있게 한 구조는 독립적이며 객관적이어야 할 기술영향평가의 뜻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따라 1970년대 이후 기술영향평가 제도를 도입해 시행 중인 유럽 여러 나라들처럼 평가기관을 의회 안에 따로 설립하는 등의 개선 방안이 마련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영국·독일 등 나라에선 주로 국회의원들의 의사결정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과학기술자와 일반시민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평가제도가 운용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98년과 99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와 시민단체들이 ‘유전자 조작 식품’이 ‘생명복제 기술’을 대상으로 시민과 과학자가 함께 참여하는 합의회의를 열어 이 제도의 도입을 촉발하는 계기를 마련한 바 있다.
김병수 시민과학센터 간사는 “기술영향평가가 평가기관의 독립성 문제 외에도 기술이 사회에 끼칠 영향보다는 기술의 시장성 예측에 치중하는 등 애초 취지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며 “시민과학단체를 중심으로 법 개정과 제도 개선을 위한 토론회 등 활동을 벌여나가겠다”고 말했다.
과기부와 키스텝은 기술영향평가 보고서를 오는 4월께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 보고해 관련 정책에 반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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